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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안태현 시집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by 정구찬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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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불안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유퀴즈에 이지선 님이 나온다는데 그 얘기를 할까 카카오톡 이모티콘 미승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하다 어느 것도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 안태현 시집을 읽었다.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오히려 상처주기도 하는 운문이었다.

 

 

시집

 

병뚜껑에 대한 이해

짧은 생을 어디에서나 목격하지만
단숨에 비트는 이것이
목이라면,
그래서 밤이 오는 것이라면 끔찍하다

밤은 비상식적으로 길어져서
어떤 방향이든 걸어가야 할 나선이 필요하고
여기요!
그렇게 외칠 때
당신의 이야기는 이미 증발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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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인터넷에서 이 단락을 읽었을 때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 어떻게 병뚜껑을 따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시인들은 정말 멋지다. 일상생활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눈에는 세상이 거꾸로 보였다가 옆으로 보였다가 사선으로도 보였다가 알쏭달쏭하게 보이는 것 같다. 병뚜껑을 비트는 것에서 어떻게 삶을 생각해 냈을까. 

 

어둠 속에서 납작 엎드려 뒤꿈치를 들고 찾아보는 너의
맹독성
대체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거지?

한 번 굴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일생은 검고, 틈이 많고,
나는 자주 너의 냄새를 좇는다

 

노래 가사처럼 시의 매력도 나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시는, 이야기는 온전히 나의 이야기가 된다. 놀랍게도 위 시의 제목은 '굴러가는 동전의 경우'이다. 아마 안태현 시인도 베토밴이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분노를 담은 론도 카프리치오처럼 어디 구석에 들어가버린 동전을 보고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나의 삶이나 사라질 것들, 사라진 것에 대해 생각했다. 

 

시로 여는 세상

시로여는세상 기획시선으로 일종의 시리즈로 나온 시집이고 12번째 권이다. 다른 재미있는 시집들도 많으니까 읽어봤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소설에 비해 시는 인기가 덜한 것 같아서 아쉽다. 

 

물론 나도 예전에는 시가 무슨 재미가 있냐는 생각을 했다. 소설처럼 상상이 쉽지도 않고 도대체 시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문제집에서만 시를 봐서 그런지 마치 정답이 정해져있는, 시인의 의도와 작품을 옳은 방식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나의 방식대로 소설을 읽고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시도 나만의 방식대로 해석하면 되는 쉬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처럼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사랑노래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이별노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시는 어쩌면 또다른 노래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니까 시를 대하기 훨씬 편해졌고 관심을 더 쓰게 되었다. 시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단계이지만 벌써부터 그 매력에 흠뻑 빠져드는 것 같다. 모두가 시의 매력을 알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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